창업자 이대발
HOME    HOME   >   창업자 이대발   >   포토갤러리
포토갤러리

공감코리아 기사 - 명장의 스펙은 ‘경험’과 ‘열정’입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1-03 12:10 조회2,386회 댓글0건

본문

2
 
명장의 스펙은 ‘경험’과 ‘열정’입니다” 대한민국 농업명장 이대건 |2.언론뉴스
김금만 | | 조회 9 |추천 0 | 2013.06.18. 13:41 http://cafe.daum.net/2012audwkd/Ci3j/83

공감 코리아 정책기자 마당 다정다감

“명장의 스펙은 ‘경험’과 ‘열정’입니다”


- [월간기획 ‘스펙’ 지고 ‘능력’ 뜬다] ① 대한민국 농업명장 이대건 씨

[대구] “가장 즐거운 일을 직업으로 정해 그 속에서 큰 꿈을 키워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대한민국 농업명장 이대건(47) 씨가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이 명장은 “즐거운 인생 또한 즐거운 일에서 비롯된다.”며 “이를 위해서는 부모님이 바라는 일방적인 인생관에서 과감히 탈피해 스스로 꿈을 찾아나가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 명장은 스스로 그러한 인생을 걸어왔기에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감과 긍지가 넘쳐 보였다.

이 명장은 중국산이 넘치는 우리 난 농업계에서 39개의 품목을 개발해 전국적으로 종묘를 보급하는 등 한국춘란 종 개발 및 확대 보급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1년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이어 2012년에는 대한민국 농업명장에 올랐다. 이 명장은 “대한민국 난초 명장이라는 평가가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는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열정적으로 추구해온 덕분”이라며 겸손을 표했다.

" src="http://reporter.korea.kr/reporterWeb/resources/attaches/namo/2013.06/13/62881/1_20130605_122714.jpg" width=500 align=center name=target_resize_image[] tmp_width="500" tmp_height="375">
농업명장 이대건 씨가 이대발난연구소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이대건)

그랬다. 이 명장은 중학교 시절부터 농업 과목이 그저 좋았다. 동네에서 농외 소득원으로 키우는 장미농장에서 장미 가시를 없애는 작업을 했던 어머니를 따라가면 왠지 농장이 멋져 보였다. 그리고 1년에 10번이나 새끼를 낳는 토끼를 키우면서 농업을 통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꿈을 갖게 됐다.

중학교 시절 농업 과목 은사님의 권유도 그의 장래 진로에 영향을 미쳤다. 미래에는 되레 농업이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그를 대구농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이 때까지는 그저 막연히 식물을 좋아하는 정도였다.

그가 처음 난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군 사령부 수목관리병으로 복무하던 시절이다. 죽었던 난도 살린다는 실력이 점차 소문나면서 원예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의 실력은 1989년 제대 후 창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 애호가들의 날카로운 핀잔에 수없이 자극받으며 독학을 계속했다. 급기야 그는 1993년 국내 난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정정은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호소하며 난 재배기술을 전수받았다. 1년 반동안 스승으로부터 받은 도제식 훈련은 그의 난 인생에서 전환기를 마련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 src="http://reporter.korea.kr/reporterWeb/resources/attaches/namo/2013.06/13/62881/1_20130501_163627.jpg" width=500 align=center name=target_resize_image[] tmp_width="500" tmp_height="375">
원예치료복지사 수강생과 함께 한 이대건 농업명장 (사진=이대건)

기술 전수가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스승이 자신에게 허드렛일만 시키는 것 같아 불평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한 고객이 맡긴 700만 원을 호가하는 난을 도난당했는데 자신이 범인으로 몰려 스승으로부터 쫓겨난 것. 고객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에게 변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고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자 스승은 모든 것을 용서했다. 그의 진심을 이해한 스승은 기술 전수는 물론 농장 창업자금까지 지원하며 그를 성원했다. 신축공사장에서 흘러나온 신나 냄새로 난들이 몽땅 죽어버리는 위기도 겪었지만 이 명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사실 춘란은 예전에는 일부 유명인들이 애호하는 골동품으로 취급받으며 일반인들 사이에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했다. 이 명장은 이처럼 이 같은 편견을 극복하고, 춘란을 고부가가치 자원으로 개발하고 싶었다. 그렇게 춘란 재배기술에 집중한 결과, 난에 관한 한 국내 최고라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 src="http://reporter.korea.kr/reporterWeb/resources/attaches/namo/2013.06/13/62881/1_661692046_kut0aSIA_SDC13197.jpg" width=500 align=center name=target_resize_image[] tmp_width="500" tmp_height="375">
이대건 씨가 베트남 하노이 난초 시장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이대건)

그런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 명장은 국내외 난 경연대회에서 수차례 입상했으며, 2007년 아시아태평양 세계난전시회에서 최연소 동양란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또 같은 해 임업분야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명장은 현재 한국춘란의 표준화 작업과 22개의 매뉴얼로 이뤄진 심사표준자료를 만드는 등 농업 선진화를 주도하고 있다. 그는 또 자신이 축척한 기술을 아카데미를 통해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데에도 주력하고 있다. 춘란 대중화와 자원 개발을 독려하기 위한 활동이다.

꾸준한 독학은 박사학위로도 이어졌다. 이는 그를 가르친 은사의 바람이기도 했다. 좀더 큰 기술을 개발하려면 공부도 병행하라는 것이 은사의 조언이었다. 그는 학위를 따기 위해 중국 산속을 헤매며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의 보람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 src="http://reporter.korea.kr/reporterWeb/resources/attaches/namo/2013.06/13/62881/nan2.jpg" width=458 align=center name=target_resize_image[] tmp_width="458" tmp_height="366">
이 명장은 한국춘란 전문농가를 대상으로 재배 특강과 컨설팅을 하는 등 자신의 노하우와 기술을 알리고 있다. (사진=이대건)

그는 “수많은 작물 중에서도 난은 작은 면적에서 고수익을 보장하는 것이 매력”이라며 “세계에서 중국인에 이어 한국인들이 난을 가장 좋아하는 민족인데 우리가 수출 가능한 품종을 개발해 수출에 성공하면 그야말로 ‘대박’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 명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과 정보를 활용해 국가경쟁력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국민들에게 한국 춘란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천연 유전자원임을 인식시켜가날 예정”이라며 “매년 4,000~5,000억에 달하는 수입산 선물용 동양란 시장에서 0.001% 정도인 한국산 난의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 src="http://reporter.korea.kr/reporterWeb/resources/attaches/namo/2013.06/13/62881/nan.jpg" width=500 align=center name=target_resize_image[] tmp_width="500" tmp_height="443">
이 명장이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 응용화훼과 학생들의 현장학습을 지도하고 있다. (사진=이대건)

이 명장은 “미래산업인 농업 분야에서 실력으로 성공하는 학생들이 많이 배출됐으면 좋겠다”며 젊은이들에 대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전국의 농업계 고교 학생들의 롤모델이 되고자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농업 분야에서는 학력과 자격 등 스펙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농업에 들어오면 그곳이 화훼든 조경이든 수백 가지의 기술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며 현장의 경험과 끊임없는 노력을 강조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현장에 문제와 답이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기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무엇이든 가장 손쉽게 해낼 수 있는 것부터 천천히 새롭게 다시 시작 해보십시오.”

정책기자 이혁진(직장인) rhjeen0112@empas.com
 

 http://reporter.korea.kr/reporterWeb/getNewsReporter.do?newsDataId=148762321&sectionId=PE_SEC_1_EDS0205003&call_from=extlink     : 기사 바로가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