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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1-05 20:35 조회2,6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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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베트남산까지 洋蘭 범람… 39품종 개발해 1400회 무료 보급

젊은 날 "실력 없다" 혹평에 충격… 가게 접고 본격 연구해 박사까지
흑산도·울릉도… 전국서 표본 채취, DNA 이용 원산지 감별법도 개발

"당신, 난초를 너무 모르는군."

1991년 봄, 대구 달서구 진천동의 한 원예 노점상. 24세 주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100만원은 받아야 할 사피반(蛇皮斑·잎에 뱀껍질 무늬가 있는 난초)을 두고, 단골손님이 "5만원도 안 되는 물건"이라고 했다. "쪽팔렸어요. 가뜩이나 안 팔려서 여름엔 냉차, 겨울엔 군고구마를 팔아가며 풀칠하고 있는데 '실력 없다'니까…."

그날로 가게를 접었다. 개업 2년 만이었다. "속은 문드러졌지만 이제라도 죽기살기 다시 공부해 '한국춘란(春蘭) 1인자'가 되기로 결심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이 청년이 그 뒤 한국춘란 전문농장 '이대발춘란'을 세워 연간 5억원어치 종묘를 생산하는 이대건(47) 이대발춘란 대표다. "이대발요?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라고 있었잖아요. 거기서 최민수 이름인데, 내 이름과 비슷하고 외우기 쉬우라고 따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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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건 대표. <scRIPT> document.getElementById("artImg1").style.width = wd; document.getElementById("artImg1").style.height = ht; </scRIPT>
이대건 대표는 난 업계 1인자가 되려면 생물학, 유전육종, 농장경영법, 그리고 미학적 감각까지 두루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한국 춘란의 기준을 세웠으니 이젠 아름다움을 더할 차례"라며 "한국만의, 우리만의‘진짜 눈썹’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춘란은 봄에 꽃을 피우는 난을 말한다. /남강호 기자
대구 지산동 수성소방서 맞은편에 그의 춘란연구소 '관유정(寬裕亭)'이 있다. '너그럽고 넉넉한 사람들이 주머니 열어 놀다가는 정자'란 뜻이다. 600㎡(180평) 크기 온실에 줄무늬 없는 것, 잎 가장자리에 희고 노란 줄무늬가 있는 것, 호랑이 가죽처럼 가로띠가 나타나는 것 등 수만 포기 난초가 빼곡하다. 직접 본 춘란은 잎이 한 뼘 겨우 채울 만큼 작았다. 이 대표가 "잎이 두꺼울수록, 초록이 진할수록, 잎이 짧고 넓적할수록, 잎끝은 둥글수록 귀하다"고 했다.

그는 2군사령부 수목관리병으로 복무하면서 춘란을 처음 봤다. 공관장이 '난을 죽이면 영창 보내겠다'고 겁줬다. 영창 안 가려고 헬기장 흙에 난을 키워가며 기초를 익혔다. 그때 알았다. "저랑 난초랑 궁합이 잘 맞았어요." 동료들 난은 얼마 못 가 누레졌다. 죽어가던 난이 그의 손에 들어오면 기운을 차렸다.

1989년 22세 때 첫 가게를 차렸다. 망신만 당했다. 군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주워 모은 지식으론 난상(蘭商)이 될 수 없었다. 도서관·헌책방을 뒤져 관련 책을 섭렵했다. 일본 흥화원의 우메모토를 멘토로 삼았다. 도쿄대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3대 가업으로 난 농장을 경영하던 우메모토는 '과학적 이론에 근거해 난을 기르자'고 했다. 청년 이대건도 이론을 장착한 난초인이 되고 싶었다.

1993년 국내 난 대가(大家)로 꼽히던 정정은 영남난원 대표에게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정 대표 앞에서 난초 책을 와르르 쏟았다. 정 대표가 물었다. "이거 와 들고 댕기노?" "제자가 되고 싶습니더." "배워서 머할라꼬?" "1인자 될 낍니더." "…."

20개월간 가르침을 받았다. 그중 7개월은 돌만 '주구장창' 씻었다. "난초 죽이는 5대 질병 중 3개가 돌에 달려 있습니다. 돌이 뾰족하면 뿌리에 상처가 나서 결국 난이 병들거든요."

1995년 28세 때 달서구 진천동에 두 번째 가게를 열었다. 장사가 잘됐다. 가게를 열배로 넓혀 옮기며 생애 봄날을 만끽했다. 하지만 곧 옆집에서 시너 냄새가 흘러 들어와서, 강풍에 비닐하우스가 날아가서, 중국 춘란이 한국 춘란으로 둔갑해 깔리면서 보증금만 건져 계단 밑 단칸방으로 밀려났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 것만 고집했다. 왜 한국 춘란인가. "중국 춘란은 향이 그윽하고, 일본 춘란은 색과 무늬가 화려합니다. 한국 춘란은 청초해요. 쉬이 얻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죠."

2002년 그의 고투(苦鬪)를 눈여겨보던 한 애호가가 ①속이지 말 것 ②대학에 갈 것 ③지식을 대가 없이 나눠줄 것을 요구하며 1억5000만원 수표를 내밀었다. 약속을 지키려고 이듬해 구미1대학 원예조경과에 들어가 대구가톨릭대로 편입한 뒤 조직배양으로 석사 학위를 땄다. '호(가는 줄무늬)에서 중투(넓은 줄무늬)로 발전시키는 키메라(돌연변이 반점) 원리'를 개발했고, 2011년 대구가톨릭대에서 춘란 DNA 분석을 통한 원산지 판별법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5월에는 SCI급 논문 '춘란 품종에 대한 SSR DNA 마커의 복합유전자형 결정과 운용'을 발표했다.

3년간 백령도에서 흑산도까지, 제주도에서 울릉도까지 한국 춘란 표본을 채취했다. 난 심사 표준 자료도 만들었다. 대한민국난등록협회에 최다(最多)인 39품종을 개발해 등록했고, 그걸 전국 농가에 1400차례 공짜로 나눠줬다. 2012년 고용노동부·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하는 '농업 명장 1호'가 됐을 때 그는 "여한이 없다"고 울먹였다.

국내에서 개업·승진 등 축하 선물로 팔리는 난 시장은 5000억원 규모다. 그 가운데 한국 춘란은 0.1%도 안 된다. 중국산, 베트남산, 양란 등 생산지와 원산지 불명인 것이 수두룩하다. "관공서에 들어가는 난이면 국산을 써야죠. 소는 한우를 먹자면서 난은 왜 중국산을 쓰나요?"

그는 "난은 내버려 두면 토끼가 뜯어먹는 잡풀에 지나지 않는다"며 "하지만 잘 살려서 키 작은 단엽이나 잎끝이 동그란 환엽에 무늬가 들게 하면 3만원짜리가 300만원짜리가 되는 골든 시드(golden seed)"라고 했다. 단엽 중투인 천종(天種)은 포기당 3억원을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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