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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하나로 살아온 외곬인생…마침내 '일가'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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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1-08 23:35 조회1,9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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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하나로 살아온 외곬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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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일가'를 이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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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춘란 연구에 매진해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세계적인 난 전문가로도 인정받고 있는 관유정 이대발 원장.


험난한 인생길. 이리저리 휩쓸리고 흔들리다 보면 자신의 '꿈' 하나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다. 한우물 파기에 매진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어도 몇 번의 실패에 부닥치다 보면 '포기'라는 단어가 이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도 이 악물고 자신이 세운 목표를 따라 똑바로 한 길만 내디뎌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이 있다.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 삼아 수십 년 외길을 고집한 사연을 들어봤다.

 

 

◆난 박사 이대발(45`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평생 춘란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관유정(난 아카데미) 이대발 원장은 "난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진정 관심을 쏟는 것은 난 자체가 아니다. 난이 사람에게 주는 행복감과 정서적 안정을 통한 치유(원예치료) 효과에 반해 난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굳이 비싼 수백, 수천만원짜리 난일 필요는 없습니다. 흔하디 흔한 난초라도 키워 보면 그 초록색이 전해주는 생명력과 새로운 촉이 뻗어나 조금씩 커가는 기쁨에 매료될 겁니다."

이 원장은 난 가꾸기가 노후 생활을 위한 준비로도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중년에 접어들어 난 가꾸기에 입문하면 노후의 소일거리가 될 뿐 아니라, 심리적 안정 효과와 더불어 소소한 경제적 수익까지 가져다준다는 것. 그는 "춘란은 가격대가 높은 편이어서 새로운 촉이 하나 자라나면 종류에 따라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에 거래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이 난초에 입문한 것은 1987년 군에 입대하면서부터다. 원예병으로 난을 가꾸는 임무를 맡으면서 '영창 가기 싫어서' 죽기 살기로 난을 공부했다며 웃었다.

그는 군 제대와 함께 일생을 난초에 걸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시작했던 화원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면서 그는 스승을 찾아 나섰다. 이 원장은 스승인 정정은 선생에게 난을 사사하기 위해 그의 취미를 귀동냥한 뒤 볼링장에 취직까지 할 정도로 치밀함도 있었다. 볼링장에서 눈도장을 찍은 스승 앞에서 어느 날 난 관련 자료를 한 아름 안고 가다 넘어지는 '쇼'를 연출하면서 극적으로 스승의 난원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마치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우듯 6개월 동안은 난 화분의 돌 씻는 일만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나중에 알고 봤더니 돌을 제대로 씻는 것만으로도 난이 제대로 살아나는데 60%를 좌우한다고 하시더라"며 "그 후 손님 응대법과 거래처까지 아낌없이 모든 가르침을 다 주셨다"고 했다.

이후 이 원장은 '너그럽고 넉넉한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이란 의미의 관유정(寬裕停)이란 이름의 난원을 내고 '난 아카데미'를 통해 난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난에 대한 여러 문제를 상담해주고, 무료 분양까지 하게 된다. 또 2008년 행정안전부 선정 임업 분야 신지식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흔히 난은 키우기 까다로운 식물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상식입니다. 우리나라 소나무 아래서 자라는 3가지(맥문동`이끼`춘란)에 들어갈 정도로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지요. 난을 키우는 분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물을 적게 줘서인 경우이고, 두 번째는 온도와 적절한 햇빛 공급에 유의한다면 어렵지 않게 난초를 기를 수 있습니다."

(대구매일신문 2011.11.19 한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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