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지원
HOME    HOME   >   고객지원   >   매일신문 칼럼

매일신문 칼럼

매일신문 칼럼

한국의 난계

본문



추사 김정희의 불기심란도(不欺心蘭圖)에 묘사된 춘란을 보면 우리 민족의 고단한 삶을 보여 주는 듯하다. 우리나라 난은 보통 춘란과 한란으로 나뉜다. 춘란은 내륙에서, 한란은 제주도 한라산에서 나름대로 가계를 이루며 자라고 있다. 한때 한란에 향이 있다는 이유로 남획되어 멸종될 뻔한 적이 있어 문화재청은 한란을 천연기념물 제191호로 지정했다. 우리나라에서 난을 애호하는 층을 살펴보면 춘란이 98%에 달하고 그 다음이 풍란과 새우란, 한란, 석곡, 야생난 등의 순이다.

춘란은 그 자체로만 본다면 야생에서 살아가는 할미꽃보다도 존재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이름다운 미술적 표현특성이 잎과 꽃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이유와 신비스러움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춘란에 대해 열광한다. 중국과 달리 오로지 춘란뿐이다.

한국 춘란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파견 온 일본인 교사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이를 본 사람들에 의해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1960년경에 난 문화가 생겨났다. 1세대들은 일본에서 서적을 가져와 하나하나 적립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경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되기 시작한 춘란과 한란을 계기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난 문화가 확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에서도 난 전문판매점이 생겨났는데, 지금 5만원쯤 하는 중국 춘란 송매(宋梅`중국을 대표하는 사천왕의 으뜸인 유향 춘란)가 변두리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이후 1970, 80년대 들어 1세대들에 의해 전파된 자료를 바탕으로 춘란을 채취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들어오던 명품 난에 버금가는 품종이 우리나라에서 대거 발견됨에 따라 춘란은 급격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때가 한국 난의 춘추전국시대이다. 이들은 1세대와는 달리 소득과 상관없이 산채활동을 통해 난을 접할 수 있었으며, 자연스레 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1980년대 후반에 입문한 필자도 값이 나가는 난을 채집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쓸 만한 난 한 포기를 채집하면 마치 로또에 당첨된 듯한 분위기였다.

1990, 2000년은 그야말로 한국 난계의 최고 전성기였다. 한국 춘란이 천연유전자원임을 세상에 알리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후 IMF 구제금융사태를 거치면서 그 열기는 조금씩 가라앉아 지금은 난 값이 안정됐다. 1만원, 2만원이면 귀한 한국 춘란 소심을 한 분 구입해 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대건(난초 명장) 작성일: 2013년 0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