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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열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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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 당시, 대규모 실업자가 발생했을 때 춘란 시장은 오히려 뜻밖의 호황을 맞았다.

당시 실업자가 된 많은 사람들이 심신을 달래려고 춘란 기르는 취미에 빠졌기 때문. 춘란은 2, 3년을 기르다 보면 난초의 깊은 맛에 심취해버리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당시 춘란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이들은 우수한 신품종을 구하기 위해 난초 상점에 선수금을 지불하면서까지 좋은 난을 기다렸다. 대출을 내서 난을 산 이들도 있었다. 서울과 경기도 등에서는 ‘난 펀드’가 생겨났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너도나도 난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이름있는 난 농장들은 펀드를 통해 큰돈을 번 사례도 있었다.

난초를 보지도 않고 돈만 맡기는 식의 ‘묻지 마’ 펀드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수익률이 60%를 웃돌아 어떤 금융 상품보다도 좋은 투자 대상이었다. 눈치 빠른 일본인들도 우수 품종을 사려고 한국을 방문해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일본 수집상들은 국내 큰손보다 훨씬 고액을 지불하면서까지 우수 품종을 구입해 가져갔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춘란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난 값이 치솟았다. 춘란은 그야말로 황금을 생산하는 작물이 되었다. 당시 희귀한 난이나 우수 품종을 채집하면 몇천만원을 호가해 많은 이들이 산으로 난을 찾아 다니기도 했다.

어떤 난초 명산지는 주말이면 난을 채집하기 위해 몰려든 관광버스로 붐벼 그야말로 노다지를 찾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부작용도 있었다. 이 틈을 노려 업자들이 싸구려 중국산 춘란들을 대거 밀수입했기 때문. 이들을 한국산으로 속여 시장에 공급했다. 2009년부터 춘란 열풍이 식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과학적인 난초 재배법이 개발되었다.

이 덕분에 토종 한국 춘란은 거의 죽지 않게 되었다. 개체 수도 불어나 지금은 난 값이 안정되어 몇만원이면 노란 중투를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이대건(난초 명장) 작성일: 2013년 08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