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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가 겪은 6.25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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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원자 작성일13-06-22 20:29 조회13,154회 댓글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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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가 겪은 6.25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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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살아계실때 해마다 6월이 되면 엄마가 들려준  6.25 사변 이야기가 생각난다.엄마는 어린 우리를 데리고 6월이면 6.25사변을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때마다 우리 엄마는 책으로 엮어도 몇권은 될거라고 하셨다.

예전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때 미술시간에 포스터를 그리곤했다.겨울에는... "자나깨나 불조심 꺼진불도 다시보자."

6월이면 ..."상기하자. 6.25" "잊지말자.6.25" 하고...친한 친구끼리 구룹을 지어 한 친구집에 모여 숙제를 하곤했는데 요즈음은 보기 드물다.

엄마는 서울에서 태어나 여고를 나오셨다. 그당시 학교의 배구 선수까지 하셨다.엄마의 오빠소개로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셨다.  신식 결혼식을 하셨다. 그당시 신식결혼식은 정말로 드물었다하셨다. 하얀드레스를 입으신 결혼식 사진이 있었는데 잊어버렸다. 아래 여동생이 갖고 있었는데...... 그만......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이다. 그러니 해주에서 서울로 유학을 하던차에 엄마를 만나 결혼하셨던것이다.해주 아버지의 집은 참말 좋았다고 하셨다. 대문도 여러개였고 언제나 손님들로 집안은  버글 버글 하였다한다.

6.25가 터지기전  그러니 아버지의 아버지이신 할아버지께서는 학교 교장선생님이셨다. 지금은 통일이라는 말이 뜸해졌지만 얼마전까지 통일이라는 말이 한참일때 아버지는  통일이되어고향으로 돌아가는게 소원이셨고 한잔 하시는 날에는 우리 형제 모아놓고 한가닥 희망을 갖고 만약 통일이되면 너희들에게 땅을 많이 나누어 주실거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한편으로는 그래도 한구석 꿈과 희망은 갖고 재미있게 듣고  했었다.

"난 산기슭을..... 난 논을..... 난 밭을..."하면 덩달아 아버지는 더 신나서 옛 지난  날을 되살리곤 하셨다.그러나 이제 아버지 아흔이 넘으셔 그런이야기는 전혀 안 하신다. 살아생전 가망이 없다는 걸 아시는거다.

6.25가 터졌다.피난을 해야만 했다 하셨다. 정말로 힘든 고생이었다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따로, 아버지따로, 엄마 우리 형제들 따로왜냐면 노인들은 잡혀도 총을 쏘지 않았다한다. 남자는 무조건 보는대로 쏘았다한다.그래서 지정한 장소에서 만나기로하고 각자 피난을 하기 시작하셨다한다. 할아버니할머니는밝은 낮에  걸어서 38선을 넘는게 가능했고  아버지는 인천을 향해 배를 타고 내려오셨고 문제는 엄마였다. 위로 오빠 7살, 저 4살 그리고 엄마는 아래여동생을 임신한상태였다.오빠는 손에 잡고 저는 없고 배는 부른채로 머리에는 보따리를 얹고 안내하는사람에게 짐을 맡기고  따라서 밤에 넘기로 하셨다. 험한 산, 가시덤불산을 그것도 아주 칠훍같은 밤에 38선을 넘었다.아무 것도 안보이는 밤에 숲을 헤치며 앞만보고 넘고 있을때 갑자기 불빛이 번뜩했다짐꾼은 "업디려!" 소리쳤다. 그때는 남으로 피난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북한군은 산속을 뒤지고 다녔다한다.그리고 한참있다 일어났다. 짐꾼이 아마도 살괭이였나보다 했다. 그리고 저 산아래로 부조건

뛰어나가라하고 말하고 사라졌다한다. 엄마는 업고 손잡고 무조건 달려내려갔다하셨다.얼만큼 가시덤블 헤쳐 가는데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을 보았다하셨다.조그만 집한채가 있어 문을 두드리며

."여기가 남입니까? 북입니까?" 했더니

"남이요."하얀 할머니의 대답에.....

엄마는  기절을 하셨다한다. 한참후 깨어나니 따둣한 아랫목이었다고...친절한 노부부"쯧 쯧 얼마나 고생인고."친절히 보살펴주셨다하셨다.고무신은 간데없고 발바닥은 갈기 갈기 찢어져 피투성이었는데 아픈줄몰랐다고하셨다.아버지를 경기도 양주에서 만났다. 9월 27일  아래 여동생이 태어났다.방공호속에서.....그 쏟아지는 총알속에서도 아버지는 동네 산파를 부르기위해 나가셨다한다.

"탕" 그때의 그 상처가 아직도 선명하다.

대구에서 모두 만났다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양주에서 대구로는 콩나물같은 트럭을 탔다하셨다. 아버지,엄마, 오빠 , 나 그리고 3개월된 동생이 트럭 꼭대기에 탔다하셨다.운전수가 졸았다. 웅덩이 옆에서..... 트럭은 고꾸러졌다.나는 틩겨나가 풀밭에있었다. 다행이 다 일어났는데오빠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발벚고 찾았다. 몇시간후 웅덩이 속에서 찾았다. 다행이 살아있었다한다.

오빠는 아직도 이마에 커다란 상처 흔적이 있다.

대구에는 엄마의 언니가 살고있었다, 거기로 다 모이것이다. 그때 이모집의 일년 먹을 양식이한달만에 동이 났다고 했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난다. 할아버지께서 마당에 쌀을 한줌 뿌리고  바구니를 작대기에 걸쳐놓고방안에서 조그마한 구멍을 뚧고 망보며  참새를 잡으셨던 일이 ......방천에서 목욕했던 일이...... 동생은 너무 약해 쥐고기를 몰래 쇠고기라하고 먹였다한다. 아래 두 동생을 더해 우리는 이렇게  자랐다.해마다 엄마에게 이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그런데 엄마는 그때 너무 고생하셔 일찍 돌아가셨나보다.

어디 우리 식구들만이 이 뼈아픈  전쟁을 겪었였나만은
전쟁은 없어야한다.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
 
영원히 아주 영원히.......................

댓글목록

난용님의 댓글

난용 작성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 치열했던 동족간의 비극을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른다고 합니다.

깜씨님의 댓글

깜씨 작성일

육이오에 현실이 이글귀에 다있군요.

자아님의 댓글

자아 작성일

올바른 인식과 까달음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부강한 나라를 빨리 만들어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아니됩니다.

민수아빠님의 댓글

민수아빠 작성일

ㅠ ㅠ 이야기 읽으면서 슬픈 감정이. 빠른 통일을 기원합니다.

탱주님의 댓글

탱주 작성일

좋은글 감사합니다.

제주한란님의 댓글

제주한란 작성일

저의 외조부모님도 해주에서 피난 오셨습니다. 제주도까지요. 중간에 외조부, 외조모님 헤어지셨고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만나기로 하셔서 한 달 후에 기적처럼 만나셨다지요. 이후 제주도에 정착하셔서 어머니를 낳으셨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동창 아버지를 만나 저와 제 여동생 둘을 두셨지요. 외조부모님께서는 이후 대전으로 터전을 옮기셨고 그곳에서 하늘나라로 가셨답니다.
저는 여기 제주도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 6.25는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되겠지요. 반갑습니다 조원자님.

풍란초님의 댓글

풍란초 작성일

좋은글 감명깊습니다